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앤퍼니 하더웨이 (문단 편집) === 학창 시절 === [[파일:external/ballislife.com/penny-hardaway-memphis-tigers-game-shots.jpg]] 청소년기 때는 고향에 있는 트레드웰 고등학교에 다니며 가머 큐리(1947~2005)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에이스로 맹활약했다. 이때 '''평균 36.6점, 10.1 리바운드, 6.2 어시스트, 3.9 스틸, 2.8 블록슛''' 이라는 가히 비범한 기록을 찍어내며[* 여담이지만 미국에서는 진짜 프로진출을 진지하게 노리는 운동부들과 동아리 정도로만 운동을 하는 학생선수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NBA급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과 수준 차이가 엄청 나서 고등학교 때 진짜 말도 안되는 스탯을 찍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양학. 고졸로 NBA에 직행한 코비 브라이언트, 케빈 가넷은 각각 30.8점 12리바운드 6.5어시스트 4스틸 3.8블럭, 25.2점 17.9리바운드 6.7어시스트 6.5블럭을 기록했으며 마이클 조던은 4학년 때 29.2점 11.6리바운드 10.1어시스트로 트리플 더블을 찍었는데도 원하던 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 스테이트에 진학하지 못했다.] 전미에 손꼽히는 고교선수로 각광받게 된다. 많은 대학들이 페니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페니와 할머니 루이스는 고향팀인 멤피스 주립대학교에 가기를 원했고, 멤피스 주립대 역시 페니를 강력하게 원했다.[* 당시 페니를 스카웃하려고 했던 농구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페니는 너무 착해서 주변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루이스 여사가 '''"당신, 누구 말을 믿는 거야? 나야? 아니면 기자들이야?"''' 라는 말을 듣고 페니를 데려올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하지만 이 때 페니는 '''공부를 거의 안 해서''' 학교성적이 대학에 갈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SAT점수도 멤피스 주립대가 원하는 기준에 미달이었다. 이러다 보니 주니어 칼리지에서도 몇 군데 왔다갔었다고. 하지만 루이스 여사는 완강히 멤피스 주립대를 고집했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학과장의 추천입학이 남았다. 다행히 학과장은 페니의 입학을 허락해주었다. 물론 이게 불공평하다고 엄청난 항의를 받아야 했다.하지만 이후 페니의 마지막 학점을 보면 A- 였다고 한다. '''즉, 공부를 못 했던게 아니고 안 했던 것.'''' 그 후 페니는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부에도 열성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1학년 때 페니는 거의 농구를 하지 못했는데, 어떤 ~~미친 개쌍놈의 쌔끼~~ 괴한이 페니의 다리에 총을 발사했기 때문이었다.[* 페니의 왼쪽 발목 위에 있는 불독 문신이 이 총상자국을 덮은 문신이다.] 2학년 때는 래리 핀치(1951~2011)[* 테네시 주 멤피스 태생. 멜로즈 고등학교 졸업 후 1970년 멤피스 주립대학교에 진학하여 진 바토우(1930~2012) 감독의 지도를 받아 3학년 때인 1972-73 시즌에 후배 래리 키넌 등과 함께 농구부를 NCAA 전국대회 결승까지 올리는 데 주력했고, 1973년 NBA 드래프트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68번으로 뽑혔으나 ABA 팀 멤피스 탐스(사운즈)로 가 2년 간 프로 선수로 뛴 바 있고, 은퇴 후 1978년부터 새로 창단된 앨라배마 대학교 버밍햄 캠퍼스(UAB) 농구부 코치로 합류하여 은사 바토우 감독 옆에서 일하다가 1979년부터 모교인 멤피스 주립대 코치로 돌아가 다나 커크 감독을 보좌하며 1985년 전국대회 4강 진출에 기여했다. 1986년부터 감독으로 승진 후 임기 11년간 페니와 데이빗 본 외에 엘리엇 페리, 로렌젠 라이트, 세드릭 헨더슨 등을 길러냈다. 퇴임 후 1998년에 셸비 카운티의 등기관 후보로 나서려다 가이 베이츠(1919~2000)에게 패했고, 2002년부터 뇌졸중으로 투병하다 2011년에 숨을 거뒀다. 2000년 멤피스대 캠퍼스 안에 그의 이름을 딴 농구 훈련장이 세워지기도 했으며(2017년부터 배구부가 사용중), 2021년 10월에는 '래리 핀치 광장(Larry Finch Plaza)'을 조성하며 그의 선수 시절 모습을 본딴 [[https://youtu.be/RP3XOh4bx7M|동상을 세웠다]].]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부상을 딛고 투혼을 발휘해냈다. 1992년 NCAA 전국대회 때 후배 데이빗 본과 함께 16강에서 존 배리[* [[릭 배리]]의 차남.], 맷 가이거 등이 포진한 강호 조지아 공대를 83-79로 꺾는 파란을 일으켰지만 8강전에선 [[닉 반 엑셀]]이 이끄는 [[신시내티 대학교]]에 57-88로 졌다. 이 공로로 그는 그레이트 미드웨스트 컨퍼런스[* 1991~1995년까지 존속한 NCAA 디비전 1 컨퍼런스로, 멤피스대 외에 루이빌대, 앨라배마대 버밍햄 캠퍼스(UAB), 드폴대, 신시내티대, 튤레인대 등이 소속돼 있었다. 해체 후 소속 학교들은 새로 생긴 '컨퍼런스 USA' 등지로 흩어짐.]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고, 드림팀1의 연습상대인 '''USA Basketball Developmental Team''' 에 선발되었다. 이때 선발된 멤버들은 [[크리스 웨버]], 바비 헐리, 자말 매쉬번, [[앨런 휴스턴]], 로드니 로저스, 에릭 몬트로스, [[그랜트 힐]] 등 전미 최고의 대학선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연습경기에서 드림팀을 '''이겼다.''' 물론 다음 연습경기에서 무자비하게 깨졌다.[* 당시의 선수들이 훗날의 토크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경기에서 드림팀 선수들은 나름 핸디캡을 적용한다고 초반에 일부러 쉬엄쉬엄 뛰다가 어느 정도 점수 차이가 벌어지면 그때 제대로 뛰어서 따라잡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연습 경기라 풀타임이 아니어서 점수 차이가 벌어지고 드림팀이 이제 막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경기가 끝나버렸다고 한다. ] 3학년 때 평균 22.8점, 8.5 리바운드, 6.4 어시스트를 기록해서 NCAA 토너먼트로 연속 진출시켰지만 웨스턴 켄터키 대학교에게 52-55로 아깝게 스윕당했다. 대신 이 실력을 바탕으로 네이스미스상과 존 우든 어워드의 강력한 후보로 올랐다. 그리고 그는 NBA로 가기로 결심한다. 이는 프로에서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고 싶었고, 할머니를 더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1993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되었다. 하지만 1순위로 올랜도 매직에 지명된 [[크리스 웨버]][* 웨버 또한 커리어 내내 부상과 싸운 선수였다. 신인상 이후 돈 넬슨과 역할차이로 루키 시즌 이후 워싱턴으로 이적하게되었고 결과적으로 웨버와 GSW에게 모두 악영향을 미쳤다. 파워포워드이면서도 [[매직 존슨]]이 우상이였던 웨버는 주로 외곽에서 공을 잡고 자유롭게 플레이 하고 싶어했지만 골밑에서 센터로 쓰고 싶어했던 넬슨과 마찰이 생겼음은 당연했다. 그러나 워싱턴 이적 후 부상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치지 못했으며 비로소 96/97시즌이 되어서야 다시 한 번 그 명성을 되찾았다.][* 워리어스 역시 웨버, [[라트렐 스프리웰]], [[팀 하더웨이]]를 중심으로 어느덧 베테랑이 된 멀린이 보조자 역할을 담당하여 상당히 화려한 선수 구성과 공격적인 농구로 현재 워리어스 못지 않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으나, 웨버가 떠난 후 팀의 구심점을 잃고 팀원간의 불화로 현재 [[스테판 커리]] 시대가 오기까지 긴 암흑기에 들어갔다. 물론 06-07시즌 [[배런 데이비스]] 중심 시즌과 [[몬타 엘리스]]가 이끈 기간도 있지만 철저히 워리어스는 지금과 달리 비주류 중의 비주류 팀이였다.]와 트레이드되어 페니는 올랜도 매직의 유니폼을 입게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